복현유사 2020

다섯 번째 이야기 그리운 어머니

구술자 박인옥 / 청년 편찬자 정혁진

복현유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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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나는 가난을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복현동으로 오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지병으로 몸 져 누워있고, 병아리 같은 자식들을 위해 가장의 역할을 마다할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 밥 한술이라도 떠먹이려면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가진 기술이 없었지만, 남들보다 끈기와 인내는 자신 있었기에 야채장사를 택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가장 먼저 장터에 나가 가져온 야채들을 풀고, 가장 늦게 집에 돌아오곤 했다. 장사는 힘들었지만, 가장 힘든 건 역시 물을 기르는 일이었다. 복현동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우물을 통해 물을 공급받아 생활하곤 했다. 식수는 물론이고 모든 생활에 필요한 물은 우물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우물에 물이 모자라면 저 멀리 동촌까지 걸어가 물을 머리에 이고 자주 다녔다.

 

복현동에서 가장 힘든 기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물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이렇게 물을 기르고 야채를 팔은 돈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는 게 힘들었지만, 잘 커주는 자식들과 인자한 시어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힘이 솟아나곤 했다.가족들중에서도 시어머니는 내게 특별한 사람인데, 이 나이가 먹도록 그렇게 선하고 지혜롭고 어진 이를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이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기 전에, 시어머니는 당시 과부가 되고 말았는데 힘들게 자식을 키우면서도 언성 한번 높인 적이 없다고 한다. 나 또한 시어머니가 소리를 지르거나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바쁜 명절날에 일손이 서툴러 접시를 깨거나 음식을 망치면, 인자하게 웃으시면서 “괜찮다 괜찮다”라며 역시 늙으면 나가 죽어야 한다며 엄한 소리를하셨다. 당신이 손에 힘이 없어 쳤다고 하시던 시어머니.. 하루는 삶이 고되 술을 한잔 걸친 적이 있었다. 술이 과했는지 그날따라 서러움이 복받쳐 시어머니 면전에서 술주정을 하며 목놓아 운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황당한 며느리는 있을 수 없었는데, 혼내시기는커녕 역시나 특유의 인자함으로 “괜찮다 괜찮다”라며 “니가 얼마나 힘들었노… 우리 집에 와서 서럽고 많이 힘들제? 미안하다…” 하시던 어머니, 그런 분이 시어머니여서 다행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남들은 시어머니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만, 나는 고부갈등 하나 없이 오히려 배우는 점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남편을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많이 힘들었는데 시어머니까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매일 밤낮으로 간호를 해드리고 없는 돈에 좋다는 음식들을 사다 잡수게 했다. 지나가는 바람이겠거니, 털고 일어나시길 바랐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매일 시어머니만 바라볼 수 없었기에, 그리고 혼자서 남편과 시어머니의 간호와 생계까지 꾸리는 건 도저히 홀몸으로 할 수는 없기에, 아이들에게 간호를 맡기고는 했다. 아이들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좋지 않은 환경에도 착실하게 자라주었고, 시어머니의 요강을 손수 씻어주거나 드시지 못하는 딱딱한 음식을 직접 씹어서 입에 넣어주고는 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내 자식들이 대견하고 잘 자라주어 너무나 고마웠다. 하지만 아이들의 극진한 간호에도 시어머니는 결국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었다.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주는 시어머니가 곁에 없게 되자 참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내게 고생만 주는 하늘이 야속하지 못해 화가 치밀어 올랐고, 종교는 없지만 없던 종교까지 생길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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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며 아이들만을 보면서 살고 있었다. 아니 살고 있었다기 보다, 그저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새벽에 동이 트면 가장 먼저 물을 기르러 갔다가 시장에 야채를 내놓고 장사를 하고, 저녁이 되면 다시 우물에 물을 길어 빨래를 하고 집안일을 했다. 가족들 밥을 챙겨주고 밀린 집안일을 하고 나면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어가 있었다. 쪽잠 서너 시간을 자면 다시 아침이 오고는 했는데, 당시 동이 트는 것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그날도 여는 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느 때처럼 물을 기르고, 장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저녁밥을 지을 물을 위해 우물에 가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한 스님이 보였다. ‘복현동 마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얼굴이 없는데, 못 본 얼굴이네’라고 생각하며 지나갈 무렵, 생각 속의 스님은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쯧쯧… 어찌할꼬… 평생을 고생만 하더니 자식마저 잃게 생겼구나”그냥 지나가려했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가슴이 덜컥하여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되물었다.“아니 스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저한테 하는 말씀이십니까?”스님은 다시 대답하기를, “내 지나가다 천기를 누설하면 아니 될 일이지만, 당신을 보아하니 한 평생 고생만을 하였는데, 자식까지 잃게 될 것 같아 가여워 한마디 했습니다.”라고 하고는 “집안에 아들이 하나 있지요? 그 아들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말입니다. 아마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라며 무서운 말을 했다. 그 말은 들은 나는 아연실색하며 말했다.“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태껏 좋은 일 하나 없었는데, 어찌 제게서 아이까지 뺏어간다는 말입니까? 스님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제 목숨은 괜찮지만 우리 아이 목숨만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나는 스님의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쁠새 없이 놀란 마음과 함께 아이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까지 몸 져 눕고,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이번엔 아들까지 뺏어가겠다니… 신이 있다면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방법이 있지만 어려울 겁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스님은 너무나 당연한 말을 했다.“물론이지요. 아이를 살릴 방법만 알려주신다면 매일 절이라도 하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들이밀며 재촉하니, “아이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천 일동안 천명의 사람들로부터 인덕을 쌓아야 합니다. 아주 힘든 방법이지요”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천 일동안 천명의 사람들로부터 인덕을 쌓으라니, 천명의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지금도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있는 실정인데, 천일이나 장사를 못한다면 아들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가 굶어 죽을 일이었다.“스님 살려주십시오. 스님이 말씀해 주신 방법을 행하려면 우리 가족은 전부가 굶어 죽고 말 겁니다. 도저히 다른 방도는 없겠습니까?” 가족을 굶기게 할 수는 없었기에,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스님께 청했다.“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허나 이 방법은 당신의 진심이 하늘에 닿아야 합니다. 천 일동안 매일 복현 우물에 물을 길어 아들에게 아침저녁으로 마시게 하십시오. 그리고 천일동안 매일 동이 틀 때, 동이 질 때, 우물에 진심을 다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스님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이고 스님 물론입니다. 진심이 닿도록 밤낮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정녕 그렇게만 하면 아이가 살 수 있을까요?” 내가 되물었더니, “물론입니다. 그대의 진심이 하늘이 알아준다면 아이의 병이 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건강할 것입니다. 그럼 저는 갈 길이 바빠 먼저 떠나겠습니다.”라며 스님은 가던 길을 떠났다.

 

스님과 대화를 한 그 이튿날, 거짓말처럼 아이의 몸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살인 줄 알았더니, 점점 더 열이 심해지고 음식을 넘기기도 힘들어했다. ‘아이고, 스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아이가 죽을 뻔했구나.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에게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스님이 알려준 방법대로 매일매일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고 아이에게 복현 우물의 물을 마시게 했다. 그렇게 일과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동이 틀 때 물을 길어 아이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시장에 나서기 전까지 진심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에게 복현우물의 물을 마시게 하고, 아침과 같이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그렇게 2년이 지나고 약속한 천일이 다가올 때쯤 이제는 기도를 드리는 게 당연한 일상이 되니, 아이의 몸이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진정으로 그 스님이 고마웠다. 이윽고 마지막 천일 째 되던 날,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아이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이의 몸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을 보자, 지난 3년간의 기도가 하늘에게 닿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스님에게 더욱 감사의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이럴 게 아니구나, 생명의 은인이신 스님을 찾아서 절을 올리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복현동을 돌며 스님을 찾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스님을 찾아 헤맸지만, 어디에도 스님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못내 감사의 말을 제대로 못 전한 것 같아 아쉬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쯤, 저 복현 우물의 옆을 스님이 걸어가고 있었다.

 

“스님! 오랜만입니다. 3년 전, 스님 덕분에 제 아이가 지금 건강히 살아있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 스님에게 다가가며 하려는 말을 마치려고 할 때, 스님이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승복을 입고 삿갓을 쓰고 있는 스님의 모습에서, 영락없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었다. 한복을 입고 곱게 머리를 빗은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그 인물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나는 너무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집안의 정신적 지주이자 지혜롭고 선한 시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시어머니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져 어머니만을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고, 어머니는 인자한 웃음만을 지으며, 시야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뒷걸음질치다말고 손을 뻗었으나 닿지 않았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평생을 저를 돌봐주시고, 하늘에서도 저를 돌봐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ㅣ 정혁진 편찬자의 추신ㅣ 

20년을 경주에서 살았고, 경주 출신인 제게 복현동은 제2의 고향이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온 시간을 제외하고 성인이 된 후부터는 쭉 복현동에서 살았으니깐요. 하지만 뒤돌아보니, 복현동에서 만난 인연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대구의 다른 지역에서 만나거나, 학교를 통해 만나는 인연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인연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현동을 거닐면서 공원이나 놀이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항상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모습에 정겨움을 느끼고, 문득 옆을 바라보니 복현유사 청년편찬차를 모집한다는 현수막을 보게 되었습니다.저에게 복현동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박인옥’할머니는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채소를 팔며 집안의 가장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이셨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아왔으며, 우리가 현재에 누리고 있는 것들이 과거의 어르신들의 노력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비단 복현동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이번 복현유사를 통해 우리의 윗세대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 어떤 노력으로 살아왔는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글 솜씨가 부족해 제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던 지난날에 비해, 지금은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복현동에서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박인옥 할머니를 비롯해, 복현유사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도와주신 모든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