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촌의 재탄생, 어울림 마을 복현
오랜된 것이 아름답게 빛나는 곳, 복현1동 피란민촌
오랜된 것이 아름답게 빛나는 곳,
복현1동 피란민촌
마주 본 두 집이 서로 문을 열면 맞닿을 것 같은 좁은 옛 골목길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마을
마주 본 두 집이 서로 문을 열면
맞닿을 것 같은 좁은 옛 골목길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마을,
복현동 피란민촌
복현동 피란민촌은 복현동 615-4번지, 617-8번지로 대구시와 경북대 소유의
국공유지에 위치해 있으며, 100여개의 소규모 무허가 주택이 밀집해 있는 곳입니다.
마을의 형성은 1955년으로 신천 강변에서 이주해 온 피란민들과 수해 이재민,
경북대학교 부지 안에서 이주 온 주민 등이 모여 살면서 ‘피란민촌’이라는 명칭이
주민들 사이에서 사용되었으며, 1960년대를 거치면서 마을 형성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오래된 주택들과 문을 열면 맞닿을 것 같은 좁은 골목길이지만,
길을 걷다 마주치는 녹슨 대문과 각양각색의 우편함, 손수 가꾼 채소상자,
알록달록 색칠되어있는 담벼락, 엉성하지만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창문 등
작은 것 하나에도 주민들의 손길과 삶이 느껴지는 정겨운 마을입니다.
복현동 피란민촌은 복현동 615-4번지, 617-8번지로 대구시와 경북대 소유의 국공유지에 위치해 있으며, 100여개의 소규모 무허가 주택이 밀집해 있는 곳입니다.
마을의 형성은 1955년으로 신천 강변에서 이주해 온 피란민들과 수해 이재민, 경북대학교 부지 안에서 이주 온 주민 등이 모여 살면서 ‘피란민촌’이라는 명칭이 주민들 사이에서 사용되었으며, 1960년대를 거치면서 마을 형성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오래된 주택들과 문을 열면 맞닿을 것 같은 좁은 골목길이지만, 길을 걷다 마주치는 녹슨 대문과 각양각색의 우편함, 손수 가꾼 채소상자, 알록달록 색칠되어있는 담벼락, 엉성하지만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창문 등 작은 것 하나에도 주민들의 손길과 삶이 느껴지는 정겨운 마을입니다.
피란민촌의 오늘을 기억해 주세요.
60여년의 세월을 간직한 복현동 피란민촌은 주거여건의 악화로
2019년 복현1동 도시재생뉴딜사업 및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진행하여
주민들이 재정착할 수 있는 영구임대주택과 청년행복주택을 건립할 예정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골목길과 동네, 공간은 사라지더라도
세월의 이야기와 흔적을 기억하고 다음세대에도 전달하기 위해
주민들과 현장지원센터가 힘을 합쳐 『피란민촌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였고,
수집한 이야기와 흔적을 Bokive에 담았습니다.
60여년의 세월을 간직한 복현동 피란민촌은 주거여건의 악화로 2019년 복현1동 도시재생뉴딜사업 및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진행하여 주민들이 재정착할 수 있는 영구임대주택과 청년행복주택을 건립할 예정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골목길과 동네, 공간은 사라지더라도 세월의 이야기와 흔적을 기억하고 다음세대에도 전달하기 위해 주민들과 현장지원센터가 힘을 합쳐 『피란민촌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였고, 수집한 이야기와 흔적을 Bokive에 담았습니다.
대구 복현동 부근의 고아원 어린이들(1950년대)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아담(80)씨가
1954년부터 2년간 대구에서 거주하면서
촬영한 것으로 2007년 매일신문을 통해 공개, 사진 속 뒤편으로 멀리 보이는 붉은 건물은
경북대 과학관으로 추정
대구 복현동 부근의 고아원 어린이들(1950년대)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아담(80)씨가 1954년부터 2년간 대구에서 거주하면서 촬영한 것으로 2007년 매일신문을 통해 공개, 사진 속 뒤편으로 멀리 보이는 붉은 건물은 경북대 과학관으로 추정
대구 복현동 피란민촌 마을잔치(1980년대)
복현1동 장미공원에서 이루어진 어버이날 경로잔치행사(1999년)
대구 복현동 피란민촌 공동화장실(2020년)
복현1동 지명의 유래
대구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복현1동은 ‘견훤덤’, ‘복현듬’, ‘복현암’, ‘복현리’, ‘복흥동’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습니다.
『대구광역시 지명유래총람』 북구편에 따르면,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순왕을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의 태조 왕건과 싸워 고려군을 무찌른 곳이라 하여 ‘견훤덤’, 또는 승리를 의미하는 ‘복흥동’의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복현동 야산에 있는 경주이씨의 묘지가 있는데, 조선시대 영조(1728)가 7대조 무실공을 분무 1등 공신으로 봉하면서 하사한 땅이라 하여
‘엎드려(伏) 현모(賢慕)한다’는 뜻에서 ‘복현’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는 기록이 경주이씨
논북공파 세보에 전해져온다고 합니다.(대구 지명유래총람, 북구, 복현동).
한편, 대구광역시 북구청 홈페이지에 게시된 '복현1동' 동명유래를 살펴보면, '복현동'의 명칭은 '복현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옛 복현동 야산에 '보선암' 또는 '복현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에 선녀가 내려왔다가 보석을
빠뜨리고 승천하여 '보선암'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대구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복현1동은 ‘견훤덤’, ‘복현듬’, ‘복현암’, ‘복현리’, ‘복흥동’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습니다.
『대구광역시 지명유래총람』 북구편에 따르면,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순왕을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의 태조 왕건과 싸워 고려군을 무찌른 곳이라 하여 ‘견훤덤’, 또는 승리를 의미하는 ‘복흥동’의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복현동 야산에 있는 경주이씨의 묘지가 있는데, 조선시대 영조(1728)가 7대조 무실공을 분무 1등 공신으로 봉하면서 하사한 땅이라 하여 ‘엎드려(伏) 현모(賢慕)한다’는 뜻에서 ‘복현’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는 기록이 경주이씨 논북공파 세보에 전해져온다고 합니다.(대구 지명유래총람, 북구, 복현동).
한편, 대구광역시 북구청 홈페이지에 게시된 '복현1동' 동명유래를 살펴보면, '복현동'의 명칭은 '복현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옛 복현동 야산에 '보선암' 또는 '복현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에 선녀가 내려왔다가 보석을
빠뜨리고 승천하여 '보선암'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