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현유사 2020

세 번째 이야기 시간을 돌리는 해바라기

구술자 배옥자 / 청년 편찬자 이슬기

복현유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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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동네에서 착실하고 성실하기로 소문난 옥자는 일분일초를 허투루 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모든 동네 사람들이 고민이 있거나 힘들면 찾아오는 따뜻한 사람이다. 옥자의 집은 동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늘 밝고 명랑한 옥자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막노동, 채소장사, 아파트 입주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4남매를 홀로 키워냈다. 그렇다고 옥자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꿈이자 뚜렷한 가치관이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주고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일들을 하는 것이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닌 이웃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하며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함께 세상을 바꿔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비바람은 꿈과 가치관으로 아슬아슬 지탱하는 그녀를 세차게 몰아붙였다.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함께 세상을 바꿔가고 싶다는 꿈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4남매를 위해 현실만을 달려왔다. 옥자의 집 앞에는 여름마다 해바라기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수십여년이 지나는 동안 해바라기들은 마치 옥자처럼, 어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햇빛을 듬뿍 받으며 자라왔다. 세월이 지나고 해바라기는 한 송이만 남게 되었다.옥자는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다. 지나간 세월의 무게도 마찬가지지만 세상을 살아가며 지탱해온 것들이 많이 닳아 없어진 까닭도 있다. 그 한 송이 해바라기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넬 수 있었겠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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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네 집 앞 한 송이의 해바라기에게도 옥자에게도 특별한 일 없이 어느 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창 밖에 누워 해바라기를 보다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낀 옥자는 눈을 감고 잠시 몸을 뉘였다. ‘왜 또 어지럽노, 좀 누워야겠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깐 누웠다가 눈을 뜬 옥자는 깜짝 놀라며 문을 나선다.‘이게 다 뭐고, 여기 어디고’한 송이뿐이었던 해바라기가 옥자의 집 입구부터 문 양쪽으로 줄지어 피어있었다. 옥자는 눈을 비비며 집 앞으로 걸어나온다.‘경로당 가서 밥 준비 해야 되는데, 이게 무슨 일이고, 웬 해바라기가 이렇게나 많이 피었노’옥자는 의아해 하면서도 경로당을 향해 걸어간다.하지만 경로당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로당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고, 아이들이 재잘재잘거리며 학교에 가고 있다. ‘이게 무슨일이고, 참말로. 내가 미쳤는갑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옥자는 또 한번 놀란다. 채소가게를 하던 안방에 세를 놓고 지내던 젊은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신교, 왜 여기 있는교”“어르신, 저에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에요. 오늘은 포장마차 안가세요?”“포장마차? 내는 지금 경로당에 밥하러 가야되는데...” “경로당이요? 오늘 어르신 좀 이상하네, 빨리 나갈 준비 하세요. 필요한 채소는 준비해놨어요.”옥자는 어리둥절 해 하며 다시 집 앞으로 나온다. 집 앞에는 포장마차 리어카와 각종 채소, 분식 재료들이 쌓여있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리어카를 이끌고 이동한다.

‘이게 무슨일이고 진짜 참말로 무슨일이고’ 어리둥절 하지만 몸은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어지러워 누워있었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왜 이렇게 몸이 가벼울까? 엄청 가볍다. 학교 앞에 도착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아이들을 위해 요리를 준비한다.‘왜 이렇게 익숙하지, 몸도 마치 젊어진 것 같네, 늘 하던 일 같네. 도대체 무슨일이고 이게’경로당에 가서 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던 옥자는 눈을 뜨고 달라진 세상에 당황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적응 해 가는 모습에 끊임없이 질문만 던지고 있다.“할머니 떡볶이 주세요.”“그래그래 잠깐만 기다려봐라.”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웃으며 오랜만에 본 아이들에게 떡볶이를 나눠주던 옥자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저 해바라기, 분명히 한 송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다시 두통이 밀려오고 다시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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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옥자는 채소를 받아 다시 포장마차를 이끌기 위해 준비한다. 하지만 문 앞을 나선 옥자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만다. 예쁘게 줄지어 펴 있던 해바라기는 세-네 송이만 남고 나머지는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없었다. 세 들어 살던 젊은 여성도 사라졌다. ‘이게 또 무슨 일인고, 내가 어제 꿈을 꿨나.’당황한 옥자는 서둘러 경로당을 향해 걸어간다. 어제인지 몇 시간 전인지 모를 만큼 정신없는 와중에 아까는 없었던 경로당이 눈 앞에 있었고 어제까지만해도 투닥거리던 명자가 옥자에게 핀잔을 준다. “형님, 오늘 어디 아픈교, 왜 이렇게 늦었는교. 오늘 우리 경로당에서 뭐 한다고 일찍 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옥자가 그런데 늦는 사람이가, 뭐 한번 늦은 걸로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얼른온나”옥자의 평소 성실한 행실을 알고 있는 동네 이웃들이, 핀잔을 하는 명자를 오히려 나무라고 있었다. 계속해서 어리둥절한 옥자는 다시 무언가 이끌리듯 경로당으로 들어가 부엌 한 켠에서 자연스럽게 점심때 먹을 밥 준비를 한다. 이웃들은 거실에서 음식을 기다리며 옥자의 음식과 정성을 연신 칭찬한다. “역시 우리 배총무 음식이 제일로 맛있다.”“그럼 그럼. 배총무 만한 사람이 없다 아이가.”“배총무 벌써 몇 년째고, 이제 다른 사람이 할 때도 안 됐나, 배총무만 너무 감싸지 마소.”“그래도 우리는 배총무밖에 없는데.. 동네 일에 나서는사람 배총무말고 여기서 누가있노. 경로당 살림도 잘 살고. 늙으면 점점 더 외로워지는데, 사람같은 사람 배총무밖에 없다아이가.”“아니 형님, 그래도 이 자리는 그냥 사람 좋아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요.”“뭘 하든 사람이 좋아야지. 자리 욕심만 내가지고 뭘 하겠노.”옥자는 준비를 마치고 갑작스럽게 시끌벅적해진 경로당 거실로 나온다. 옥자가 등장하자 시끄럽던 경로당은 이내 조용해지고 다들 옥자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무슨 일 있나? 경로당이 왜이렇게 시끄럽노.”경로당 안에는 현수막이 붙어있고 현수막에는 ‘우리동네 통장선출’이라는 큰 글자가 적혀있다. “이게 또 무슨 일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네. 밥들이나 드이소”다 같이 둘러앉아 평소처럼 점심을 먹고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경로당에서 최고참인 현자가 말을 꺼냈다. “우리 배총무로 다 동의 하는 거 맞지요?”경로당 안의 사람들은 모두 박수치며 한마디씩 거든다. “그럼그럼 배총무지.”“배총무밖에 없다.”옥자는 어리둥절하다. “무슨 소리 하시는거에요 형님들.”평소 옥자를 아껴주며 친언니처럼 대하던 이웃의 순자가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 통장을 선출하라 안카나. 당연히 그래서 우리는 다들 배총무 추천했다. 그렇게 알그래이.” 이웃들의 일방적인 통보에 어리둥절하지만 옥자는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평소 마을 일에 관심이 많고 대소사를 나서서 처리하던 그녀였기 때문이다. “어제 오늘 참말로 이상하네.”집을 정리하고 다시 잠자리에 든 옥자는 생각에 잠긴다.‘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내가 삶을 잘못 살았나 잘 살았나. 왜 이런일이 생기는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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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눈을 뜬 옥자는 또 한 번 놀란다. 문 앞 양쪽에 피어있다 사라진 해바라기들이 다시 한 번 줄지어 피어있고, 서둘러 들어온 방 안에는 세 들어 사는 여성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해바라기가 피어있을 땐 청년시절 옥자의 삶, 해바라기가 세네송이 밖에 없을 땐 다시 경로당 총무로서 옥자의 삶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마치 해바라기가 옥자에게 과거에 가졌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듯 했다. 옥자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다시 한 번 꿈을 꾸며 활짝 피어날 수 있을까? 

 

ㅣ 이슬기 편찬자의 추신ㅣ

처음 복현유사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을때는 단순히 어르신들의 복현동 삶에 대한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했습니다. 어르신들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고 과거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거나(모두가 다른 삶을 살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합니다. 개인의 삶 속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개인의 역사 안에는 개인의 시각에서 바라 본 우리 동네의 풍경, 개인이 만난 사람들과 그 이야기들, 삶의 성찰 과정 등.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자산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배옥자 어르신과의 만남을 통해 이타심과 무한한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순탄하지 않았던 삶의 과정에서도 감사와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나는 현재 내 삶 속에서 감사와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표현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순탄한 삶 속에서 감사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얼마나 잘 느끼고 표현하고 있는가, 한번쯤 생각 해 보았으면 합니다.복현유사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소중한 일기장을 채움과 동시에 개인의 이야기가 문화가 되어 재해석되는 과정을 통해 창조와 모방의 과정이 한끝차이면서도 둘 다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최선을다했지만,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에는 방해가 된 것 같아 다른 청년편찬자분들과 운영자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르신께 참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꼭 전하고 싶습니다. 또 놀러가겠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어르신의 앞날이 또 다른 감사와 사랑으로 넘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