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현유사 2020

첫 번째 이야기, 수수께끼의 항아리

구술자 오종덕 / 청년 편찬자 김현진

복현유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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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옛날, 어느 마을에 오씨네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씨네 집에는 여섯 명의 남매가 있었는데 각자의 능력이 뛰어나고 인물이 좋아 마을 어딜 가나 눈에 띄었습니다. 발이 빨라 남들보다 세 배는 멀리 갈 수 있다든지, 아궁이에 대고 손뼉을 치면 불이 붙는다든지 하는 신기하고 재밌는 능력이었습니다. 여섯 남매 중 막내 아들 덕이는 아무리 넘어지고 굴러도 털끝 하나 다치치도 않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말그대로 무쇠같이 튼튼한 몸이었지요. 어릴 때부터 아무런 병치레 없이 자라더니, 그 흔하다는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지요. 마을 사람들은 복을 타고 났다고 이야기하곤 했어요. 하지만 덕이는 다른 남매들에 비해 자신의 능력이 그렇게 특별하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덕이의 형과 누나가 각각 독립하여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능력을 살려 일할 수 있는 곳도 금세 찾았지요. 그것을 지켜보며 덕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빨리 달리거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없지만 튼튼한 몸을 가졌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더 많은 것을 배우겠지?’ 그리하여 덕이는 태어나고 자란 마을을 떠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바깥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니 큰 강이 나오고, 강을 건너니 울룩불룩 언덕들이 나타났습니다. 덕이는 열심히 걷고 또 걸었습니다. 이윽고 붉은 돌산과 언덕이 있는 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나무 현판에는 ‘복현 마을’이라고 적혀 있었지요. 복현 마을 언덕에 올라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과 함께 땅- 땅- 소리가 울려퍼지는 일터가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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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쇠를 만지고 철을 다듬는 곳이었습니다. 덕이는 단단하면서도 곡선, 직선으로 각자의 모양을 찾아가고 시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쇠의 매력에 점점 이끌렸습니다. “좋아, 이곳에서 쇠를 만지는 일을 배우겠어. 새로이 살 곳은 복현 마을로 할 거야.”마침 일터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기에 덕이는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현 마을에 있는 빈 집을 구하게 되었지요. 한동안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곳이라 손 볼 곳이 많은 집이었지만 덕이는 어쩐지 그 집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덕이는 냉큼 그 집에서 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덕이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틈틈이 집을 수리했어요. 손재주가 좋았던 터라 새는 지붕 고치기, 벽 바르기, 문 달기 같은 일들을 척척 해내었답니다. 금세 새 것 같은 집이 완성되었지요. 집 안으로 짐을 들이며 분주하던 어느 날, 덕이는 마당 한 구석 무성하게 덤불이 우거진 곳에서 아주 낡은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흠집이 여기저기 나 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단단하게 뚜껑이 봉인되어 있었지요. 겉으로 보았을 땐 별 장치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발로 차기도 해보고 두드려 보기도 했지만 항아리와 뚜껑은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상한 물건이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래도 그냥 버릴 건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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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이는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하고는 마당 한구석에 세워둔 장독들 사이에 그 낡은 항아리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이었습니다. 깊이 잠든 덕이는 꿈 속에서 향기로운 꽃냄새가 어디에선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킁킁거리며 향기를 따라 가보니 어디서 많이 본 장소가 나타났어요. 익숙한 마당과 집이었습니다.“아니, 이건 내 집이잖아!” 그때 ‘펑!’하고 큰 소리가 나더니 오색구름과 함께 사람 형태의 그림자 두개가 나타났습니다. 덕이는 크게 놀라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습니다.‘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저것은 신선인가? 도깨비인가?’잔뜩 긴장한 덕이에게 오색구름 속 그림자들이 말했습니다.“우리는 오늘 네가 발견한 항아리 속에 살고 있던 신이다. 오래 전, 이 집이 텅 비고 나서부터 집과 마당은 조금씩 낡아갔고 이곳에서 살던 신들은 하나둘 떠나가던 중이었지.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 작은 항아리 속으로 대피해 들어와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시간이 지나 네가 이 집을 다시 찾는 것을 보며 아주 기뻤어. 원래 우리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알다시피 뚜껑이 열리지 않았지? 워낙 작은 항아리에 신 두 명이 들어가 있으니 그냥 힘으로 해서는 못 열 정도로 꽉 끼게 된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마. 이 꿈에서 깨자마자 아침 첫 햇살이 땅에 닿기 전 항아리를 지붕 위에 올려 놓아라. 그리고 이 곳 복현 마을의 땅에서 난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것,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것을 뿌리면서 기도를 하면 뚜껑이 절로 열릴 것이다. 그럼 우리가 있던 자리로 들어가 가택신으로써 이 집을 오래오래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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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끝나자마자 덕이는 번쩍 눈을 떴습니다. 아직 바깥은 어두컴컴한 새벽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동이 터 올 것이었으므로, 덕이는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 항아리를 찾아 들었어요. 그리고는 신이 낸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를 생각했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것…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것.… 그리고 복현 마을에서 난 것이 무엇일까? 혹시 내가 일터에서 매일 만지는 쇠와 철을 이야기 한 것일까? 불을 만나면 뜨겁고 부드러워지고, 식으면 차갑고 단단한데. 하지만 그것들은 복현 마을에서 난 것이 아니잖아. 참으로 어렵구나.” 집안 곳곳을 뒤져보아도 그 비슷한 것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허둥지둥하던 덕이는 멀리서 희미하게 하늘색이 바뀌는 것을 보고 망연자실 마당에 주저앉았습니다. 자신의 집을 지키지 못하고 불행들이 찾아오게 될까봐 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덕이는 땅바닥을 치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신들이 다 알려주기까지 했는데 그것을 못 찾고! 아이고, 아이고…아니, 이건?” 덕이는 마당의 흙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복현 마을의 붉은 돌산에서 난 것과 같이 붉은 흙, 그것을 손에 쥐고 한참 생각하던 덕이는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습니다. “맞아! 이 흙은 마을의 돌산에서 난 것, 흩으면 부드럽고 뭉치면 단단하지. 흙도 불과 만나면 뜨거워지고 식으면 차가워지니 정답은 바로 이것이구나!” 덕이는 항아리를 옆구리에 끼고, 흙을 한가득 담아 가지고선 지붕 위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항아리 위로 흙을 솔솔 뿌리며 마음 속 깊이 기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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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가택신들께서 저희 집에서 편안히 머무르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해가 솟아오르면서 아침 햇살 속에 서서히 시야가 밝아졌습니다. ‘펑!’하는 소리에 깜짝 놀란 덕이가 눈을 뜨고 보니 그 단단하던 항아리의 뚜껑이 열려 있었습니다. 항아리 속은 텅 비어 있었고, 꿈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향기로운 꽃 냄새가 솔솔 풍겼습니다. 항아리에 갇혀 있던 두 신이 바깥으로 나온 것입니다. 두 가택신들은 각각 자신이 원래 지내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한 신은 문지방으로 들어가 문왕신이 되었고, 또다른 한 신은 부엌 속 쌀항아리 안으로 들어가 조왕신이 되었지요. 문왕신과 조왕신이 덕이의 집을 잘 돌본 덕에 덕이는 자신의 가족이 각각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도 남을 정도로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집으로 커질 수 있었고 부엌에는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또 덕이 스스로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능력인 다치지 않고 병도 걸리지 않는 튼튼함은 덕이가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복이 되었지요. 덕이와 가족들은 가택신들이 보살피는 집에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ㅣ 김현진 편찬자의 추신ㅣ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복현유사에 참여해 여러 이야기를 듣고 썼습니다. 익숙한 모습의 집과 골목들인만큼 놓쳤던 부분들이 다시 보였습니다. 또 새로이 만난 오종덕 어르신으로부터 사람, 일, 집에 대한 다채로운 생각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 지역감정이 심했을 적 에피소드와 하숙생들과의 크고 작은 사건들 사이에서 사람에 대한 어르신의 슴슴한 애정을 느꼈습니다.그 애정은 어르신이 사시는 집의 작은 마당 한가득 식물을 심고 텃밭을 일구는 모습에서도 묻어나왔습니다. 따뜻했습니다. 뒤이어 어디 가지 않고 여기서 계속 살 거라는 말을 들으면서, 집을 얻기까지 어르신이 평생 일하고 노력하신 것들을 어루만져드릴 수 있는 이야기의 소재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짧은 글 한 편이지만 오종덕 어르신의 삶과 복현마을에서 함께한 이웃들의 행복을 지켜드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