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현유사 2019

복현암이 남긴 선물 – 이예지

가장 소중한 선물은 기억이다

복현유사 2019

1

 옛날 옛날에 복현동에는 복현암이라고 불리던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바위는 크고 판판한 너럭바위였으며 그 위에 사람이 앉을 수도 있었다. 언제부터 그 바위가 있었는지, 누가 그 바위를 복현암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복현동에 사는 사람들 중 야산 언덕에 있던 그 바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날,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라 복현동을 훤하게 비추던 어느 밤이었다. 선녀 하나가 희끄무리한 구름 사이를 헤치며 사뿐히 복현동 언덕에 발을 딛고 내려왔다. 하늘의 선녀가 무슨 일로 지상에 내려왔을까. 산에 있던 나무와 흙과 달 그리고 동물들은 모두 의아하게 여기며 숨어서 선녀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선녀는 두리번거리며 주의를 살피다 그 둥그렇고 넙적한 바위 위로 살며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하늘구름 위에서 지내는 것이 지겨웠는지, 어디론가 날아가던 중 힘이 들어잠깐 쉬려던 것인지는 잘 모른다. 그저 바위의 생김새가 신기하여 내려와 보고싶은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선녀는 달빛을 받으며 한참을 바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곧 다시 하늘로 올라갈 채비를 하였다. 단, 한 가지는 빠뜨리고 말이다. 걸터앉아 있던 바위에서 내려오던 순간 선녀는 그만 보석 하나를 땅에 떨어뜨리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늘로 승천하여 사라졌다. 오직 나무와 달과 산짐승들이 그 장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강산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긴 시간이 지났다. 복현암은 사라지고 지금은 집들과 원룸들이 즐비한 마을이 되어 있다. 바위가 있던 자리에는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 고향 집을 찾은 한 남자가 나타났다. 복현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남자는 취직 후 서울에서 줄곧 지내며 가정을 꾸려, 고향엔 일 년에 두어 번 내려 오는 것이 전부다.“어머니, 계십니까?”남자는 굽어진 골목을 들어서 미닫이 대문이 살짝 열린 집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침묵만 이어졌다.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어쩔 수 없이 남자는 대문을 드르륵 닫고 골목으로 나왔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낡은 의자 두 개가 보인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빛 바랜 쿠션이 칠이 벗겨진 등받이와 함께 지나간 세월을 자랑하고 있다. 남자는 잠깐 앉을까 생각하다 바람이 좋아 걷기로 한다. 좁은 시멘트 담벼락과 높다란 건물들이 햇볕을 가려주니 이 초여름에 시원한 느낌마저 든다. 큰길로 몸을 돌린 남자는 대학생들을 발견하곤 발길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지은 지 얼마 안 된 원룸들이 가득하다.‘여기 원룸이 이렇게 많았었나...’문득 예전 아버지, 어머니가 벽돌을 찍어 파셨던 일을 했던 게 떠올랐다. 그래, 그 땐 그런 일을 하면서 벌어먹곤 했는데. 남자는 어머니가 가셨을 만한 장소인 경로당으로 가보기로 한다. 가는 길에 경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나도 딱 저 아이들 나이였을 때 이 곳을 뛰어다니곤 했었지. 이런 생각을 하며 남자는 웃으며 모퉁이를 꺾었다. 하지만 경로당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경로당은 온데간데 없고 아무도 없던 동네가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찬 것이 아닌가?

 

3

‘이상하다, 내가 없는 동안 이렇게 동네가 바뀌었나?’길가엔 다 쓴 연탄재 자국이 남아있고 대부분 비어있던 동네가 집집마다 인기척을 띄고 있었다. 샷다가 내려가 있던 가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북적이며 골목의 활기를 채우고 있었다. 진주상회, 성주 슈퍼, 박씨 구멍가게, 김천 쌀 방앗간…… 모두 오래전에 사라진 가게들이다. 점빵 앞 평상에는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으며 그 앞으론 이제 막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도시락통을 달그락대며 뛰어다닌다. 좀 전의 높은 원룸건물들로 가려져 있던 해는 장애물이 사라진 게 기쁘다는 듯이 다시 강렬하게 집집들을 내리쬐고 있었다. 자신의 어린시절 과거 복현동의 모습이였다. 남자는 당황함도 잠시,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추억의 동네를 다시 마주하니 반갑고 이상한 희열감마저 들었다. 

 

4

남자는 가게가 줄지어진 골목을 천천히 걸어가보며 추억을 되짚어본다. 그러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서 자신의 몸만한 쌀 포대를 낑낑대며 끌고 올라가는 남자아이를 발견한다. 그는 아이에게 다가가 쌀 포대를 번쩍 들어올리며 말하였다.“얘야, 무거워 보이는데 아저씨가 도와줄게.”아이는 놀란 듯 주저하다, 마지못해 대답했다.“괜찮은데……. 그럼 고맙습니다. 근데 다 왔어요. 여기에요.”남자는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파란 대문집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이렇게 잘사는 집이 있었나 싶을 만큼 커다란 집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곧 그 집이 열 다섯 가구가 세 들어사는 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남자가 아이를 따라 마당에 쌀 포대를 내려놓고 집을 나오던 순간 부엌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에그머니나!”갑작스런 여자 목소리에 놀란 남자는 소리를 따라 바깥 부엌으로 가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엣된 얼굴을 한 자신의 어머니가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천장에서 떨어진 쥐를 보고 놀라 내쫓고 있었다. 남자는 지금 자신의 나이보다 더 어린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복잡한 기분이 들어 후다닥 집에서 도망치듯 나온다. 

어릴 적 그가 태어나고 얼마 뒤 지금의 미닫이 대문 집으로 이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이 집이 그가 태어나기 전 가족들이 살던 집인 것이다. 순간 남자는 우리 다섯 남매를 낳아 기르시느라 고생하신 지금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5

문득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불안감이 엄습한 남자는 다시 그 골목 모퉁이로 가보기로 한다. 몇 번이고 과거로 돌아왔던 순간을 재현해보지만 여전히 그대로이다. 망연자실한 상태로 한참을 골목에 멀뚱이 서 있는데 뒤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똥 지게를 나르는 아재가 목청껏 ‘똥 퍼’를 외치며 이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든 남자는 비켜주려 하지만 골목이 워낙 좁아 한 명이 지나갈 자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남자는 골목 끝까지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앞으로 주욱 걸어가자 똥 지게꾼은 갈림길로 사라지고 어디선가 향긋한 꽃내음이 퍼져온다. 지금의 장미공원이 있는 자리에 아무렇게나 덩굴진 장미들이 그득하다. 고갤 들어보니 지금은 사라진 나즈막한 산과 배자못까지 한 눈에 보인다.

 

6

그런데 산 언덕에 무언가 반짝하고 빛이 나고 있었다. ‘저게 뭐지?’ 남자는 홀린듯 야산으로 향했다. 남자가 언덕에 도착했을 땐, 그 곳에는 오래전 사라진 복현암만이 있었다. 그저 자신이 잘 못 본 것이라 생각하며 몸과 마음이 지친 남자는 잠시 바위위에 걸터앉았다. 그 너럭바위 옆에는 차곡히 쌓여진 소원돌탑들이 무성하다. 남자도 바닥에 예쁘고 반짝이는 돌 하나를 주워 돌탑 위에 쌓으며 생각한다.‘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그리고 뜸 들이다 다시 생각한다.‘나는 언젠가는 지금 복현동이 발전하고, 사람들 형편이 나아지는 시기가 올 것을 압니다. 그 시대에서 왔으니까요.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랐습니다. 언젠간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알면 살아가는데 더 힘이 되겠죠. 우리 마을 사람들이 하루 빨리 세상 좋아졌다며 웃을 날이 오길 바랍니다.’그 순간 갑자기 남자가 쌓은 돌멩이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땐, 과거로 돌아갔던 그 골목길 모퉁이에 서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 산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며 이게 다 꿈인가 싶었다.“우리 아들 왔냐?”남자는 어머니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어머니! 어디 갔다 이제와요?”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는 내가 알던 늙은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남자는 괜시리 반가운 마음이 격해져 서둔 발걸음으로 집으로 앞장섰다. 집 앞에 다다르자 대문 앞의 낡은 의자 두 개가 보인다. 칠이 벗겨진 의자 등받이가 주황색 노을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ㅣ 편찬자 이예지가 남기는 말 ㅣ

 제가 인터뷰한 ‘한영자’ 어르신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해오셨습니다. 옛날엔 딸린 자식들도 많고 먹고 사는데 풍족함이 없었으니 그것은 어르신 뿐아니라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힘들었던 과거를, 되돌아가고 싶은 고향의 향수로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그리워하는 복현동의 옛 모습을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을 통해 등장시켰습니다.  지금은 복현암이 있던 산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들샘공원이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래동화 같은 도입부는 복현동의 이름이 복현암의 이름에서 연유하였다는 추측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남자는 복현동의 유래에 나오는 선녀가 떨어뜨린 보석을 주워 소원을 빌었던 것이고요. 보석이 남자의 소원을 들어주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복현동 사람들은 과거를 그저 힘들었던 기억으로 회상하지 않습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으니 말이죠. ‘복현유사 프로젝트’를 하면서 복현동의 짧은 역사를 잠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신 ‘한영자’어르신, ‘이말순’어르신께 감사인사를 전합니다.더불어 이러한 뜻 깊은 프로젝트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전하며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