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현유사 2019

가람전 – 박규훈

복현1동의 이야기가 강처럼 흐른다

복현유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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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가람’은 경상북도 상주군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넉넉한 삶은 아니지만 가람의 가족과 이웃들은 식민지의 삶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비극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가람이 7살이 되던 해인 1950년 6월, 남과 북의 이념 대립으로 인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가람의 아버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징집되었다. 가람의 어머니는 그러한 남편의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남편이 돌아올 때를 생각하여 피난길에 오르지 않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공산군이 계속하여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에 딸의 미래를 위해 피란길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낙동강을 넘어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여 복현동에 정착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피란민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피란민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이다 보니 다들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집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고 주변에는 묘가 수없이 많이 있었다. 가람의 어머니는 이러한 환경이 가람이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그런 것을 다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가람이는 어린 나이였지만 또래에 비해서 영리하였고 철이 일찍 들었다. 비록 7살의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가 힘들어하실까봐 투정부리는 일 없이 어머니를 잘 도왔다.하루는 어머니를 도와 뒷산에서 나물을 캐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마을의 공용 화장실 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되어 그 쪽 방향을 바라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해골바가지가 물이 담긴 채 자신을 향해 놓여있었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 가람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어머니가 가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괜찮은지 물었는데 가람은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그냥 미끄러져 넘어진 것이라며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고 다시 씩씩하게 집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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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가람이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전쟁이 끝나 안전에 대한 불안은 줄었으나 전쟁에 의한 상처로 인해 말 그대로 찢어질듯한 가난은 여전히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강하게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피 끓는 청춘들에게 어김없이 사랑은 조용하게 찾아왔고 가람은 이웃의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 유난히 덥던 여름에 첫째 ‘마루’를, 그로부터 2년 후 둘째 ‘아라’를 출산하였다. 첫째인 마루는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그렇지만 둘째 아라는 유달리 잔병치레가 많아 항상 가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아라가 5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남편은 마을의 정보통에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갔고 가람은 앓고 있는 아라에게 먹일 물을 뜨기 위해 물지게를 이고 물을 뜨러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물을 뜨고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집 쪽에서 마루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 가람은 무거운 것도 잊은 채 잽싸게 집을 향해 달려갔다. 집에 들어서니 마루가 울면서 말하기를 아라가 몸을 움찔하더니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람은 놀라 얼른 아라를 들쳐 업고 의원으로 달려갔다. 그렇지만 의사의 말로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이미 아이가 죽었다고 하였다. 가람은 믿을 수 없어 그럴 리 없다고 다시 한 번 아이를 봐달라고 하였으나 의사는 충격이 크겠지만 받아들여야한다고, 이런 말 밖에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단호히 말하였다. 가람은 정말 하늘이 무너질 듯이 가슴이 찢어지게 슬펐다. 하지만 의사의 말대로 사실을 받아들여야했다. 가람은 돈이 없어 제때 치료해주지 못한 아라에게 정말 미안하였고 찢어질듯한 가난이 원망스러웠다. 번번한 묘비조차 세워주지 못하고 마을의 이름 없는 묘들 사이에 아라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가람은 마루만큼은 정말로 잘 키우겠다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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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은 그날 이후로 기존에 하던 밭일을 하여 시장에 내다 파는 일에 더하여 봉투를 붙이는 일도 병행하였다. 비록 큰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밭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할 수 있었기에 마을의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꽤나 하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서툴렀기에 손도 많이 베이고 속도도 느려서 많은 양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점점 일이 손에 익게 되자 더 많은 봉투를 가져와 조금이라도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이웃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봉투가 찢어져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어느 날, 가람은 마루와 함께 그간 재배한 콩도 내다 팔고 이듬해 국민학교에 입학할 마루를 위해 그간 봉투를 접어 모은 돈으로 학용품도 사고 모처럼 고깃국도 끓여주기 위해 칠성시장을 갔었다. 교통도 그다지 좋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서 칠성시장까지 꽤나 먼 거리를 걸어서 왕래하였다. 다행히 가져간 콩도 다 팔았고 여러 학용품들과 국거리용 고기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어김없이 택시 기사와 승객이 실랑이를 벌이는 익숙한 풍경을 마주했다. 앞서 말했듯이 마을 어귀부터는 도로가 제대로 닦여있지 않아 차가 들어오기 힘들었고 택시 기사들도 마을 안까지 운행하는 것을 꺼려 했다. 그렇지만 승객들은 택시를 탄 것이니만큼 집 앞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을 안까지는 운행을 해줬으면 했고 이에 택시 기사와 승객의 다툼이 자주 있었던 것이다. 양쪽의 입장은 모두 이해가 갔으나 어차피 택시를 탈 일이 없던 가람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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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또 몇 년이 지났다. 정부에서 ‘새마을운동’이란 것을 실시한다고 했다. 그로인해 피란민과 수재민들이 모여 살던 복현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배자 못 등 마을의 못 들을 메우고 산을 깎고 묘와 밭 등을 없애 도로를 건설한다고한다. 수많은 묘들 중에서 연고자가 있어 이장할 묘는 신속하게 이장해 달라고 한다. 그렇지만 아라의 묘를 마땅히 이장할만한 곳도, 여유도 없었던 가람은 결국 영원히 잊히지 않을 자신의 가슴 한편에 아라를 이장하기로 하였다. 정착한 이후로 눈에 띄게 큰 변화가 없던 복현동은 새마을운동 이후 정말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집집마다 수도시설이 제대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로인해 더 이상 물을 뜨러 물지게를이고 다녀야 할 일이 없어졌다. 또한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기 시작하면서 버스를 이용하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이와 더불어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도 생겨서 꽤나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982년에는 인근에 ‘복현종합시장’이라는 커다란 상가도 생기면서 편리성도 증대되었다.  그렇지만 무엇이든지 좋은 점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경제가 좋아지고 교통은 좋아졌지만 앞집, 뒷집 등등 서로 남이 아닌 가족같이 지내던 많은 이웃들이 복현동을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칸칸이 좁은 방이 줄지어있는 원룸촌이 들어서게 되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함께 나누던 마을 분위기가 점점 개인화가 되어가는 모습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져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가람은 마을에 남아있는 이웃들과 더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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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이러한 말을 들었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가람은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이 점점 사실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어린아이 같던 마루가 어느새 결혼을 하여 곁을 떠났다. 항상 곁을 지켜주실 것 같던, 늘 나를 위해 고생하시던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셨다. 또 어느새 강아지 같은 손자들이 생겼고, 손과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 담겼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 또한 느껴졌다. 결국 가람은 세월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팔에는 링거가 꼽혀있고 주변에는 남편과 마루, 손자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가람은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니 자신의 삶은 정말 이름대로 강과 같았다. 구불구불 순탄하진 않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가람은 하늘 아래에서 바다와 재회하였다. 12월의 추운 날씨였지만 전혀 춥지 않았고 오히려 따스함마저 느껴졌다. 강은 그렇게 재회한 바다와 또다시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였다.

 

 

ㅣ편찬자 박규훈이 남기는 말 ㅣ

안녕하세요. 저는 가람전을 집필한 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 재학 중인 박규훈이라고 합니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 어떻게 하면 주민 여러분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저희가 인터뷰를 통해서 들은 마을의 옛 모습들도 중요하지만 이야기를 해주신 주민분들의 개개인의 역사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민분들의 역사를 대변할 ‘가람’이라는 인물을 만들어 ‘가람’을 통해 인터뷰로 알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의 살을 붙여 이야기를 전개해 보았습니다. 글에 등장한 등장인물들의 이름의 뜻은 각각 가람은 ‘강’을, 마루는 ‘하늘’을, 아라는 ‘바다’를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그래서 복현동을 강에 빗대에 구불구불 힘든 일도 겪었지만 결국 끝에 다다라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닌 바다에 섞여 계속 그 속에 남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많지만 모든 이야기들을 다 넣을 수는 없었기에 축약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빠진 이야기들을 남기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게 생각되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복현유사 프로젝트’에 도움을 주신 김보배, 김순제 할머니께, 특히 김순제 할머니댁에서 인터뷰를 추가로 진행했는데요. 값진 이야기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복현동이 정말 오래오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