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현유사 2019

사내와 복현도깨비 - 김민국

운명에 맞선 멋진 사내와 신비한 복현 도깨비 이야기

복현유사 2019

1

제가 들은 옛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그 아주 옛날에 말입니다. 비가 후드득하고 쏟아지는 날에 좁디좁은 방 한 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힘차게 울면서 태어난 그 사내아이는 세 살하고도 마흔 세 번째 되는 날, 일찍이 아버지를 잃어버리고는 큰 집에서 자랐지요. 자기 몸뚱이만한 커다란 가마솥도 씻고, 동화사터마냥 큰 마당도 혼자서 다 쓸었지요. 그러면서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잣거리에 있는 장에 나간 날이었습니다. 두 손에는 동태 두 마리와 고들빼기 한 묶음을 들고 누렇게 익어버린 호박 한 덩이는 등에 지고서 장바닥을 휙휙 지나갈 때였습니다.

 

그 때 동래 장에는 조선팔도에서 가장 용하다는 관상쟁이가 내려와서는 사람들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앞으로의 일 하나씩을 귀띔해주고 있었지 말입니다. 그런 관상쟁이 옆을 사내는 스윽 하고 지나가는데 갑자기 그 관상쟁이가 큰 소리로 그 사내를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이, 이보게!” 하면서. 사내가 눈을 깜빡이면서 돌아보니 그 관상쟁이가 이리 좀 와보라는 손짓을 하고 있지 뭡니까. 그래서 사내가 다가가서 물어보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자네, 비가 후드드득하고 떨어지는 날 태어났지?”

사내는 깜짝 놀라 그걸 어찌 알았느냐 쏘아 물었습니다. 그러자 관상쟁이는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자네 얼굴을 보니 앞으로 혼인은 고사하고 부도 못 누리겠어! 내 이 말 전하려고 자네를 급히 불러 세웠네.” 하더니 신출귀몰 홍길동처럼 눈앞에서 펑하고 사라지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집에 돌아온 사내는 평상에 앉아서는 깊게 생각에 빠집니다……. 이윽고 눈을 번쩍 뜨더니 주섬주섬 보따리를 싸더니 집을 나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내는 굳은 결심을 한 것이었습니다.

 

2

 

“어차피 내 그러한 팔자라면 이 조선팔도 방방곡곡 한 번 누벼보고 죽어야겠다. 그 사이 내 팔자가 바뀔지 또 알 게 무엇이냐!” 그렇게 사내는 짚신 두 켤레를 보따리에 던져 넣고는 길을 나섰습니다. 사내는 발길 닿는 대로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 한양에서는 바다 건너온 번쩍거리는 돌들도 보고, 순천에 가서는 해삼(海蔘)에다가 석수어(石首魚), 광어(廣魚) 같이 팔딱거리는 생선을 배터지게 먹어도 보고, 지금의 울산인 서생포에 가서는 처용탈을 쓰고는 마음껏 뛰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경상도로 들어와 금호강을 따라 흘러 흘러 걸어서 한 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그 곳이 바로 복현(伏賢)이었습니다.

 

3

 

사내는 산등이 기다란 진등골을 건너 배자못이라고 하는 커다란 연못을 서쪽으로 빙빙 돌아 복현에 들어서니 깊고도 맑은 우물 하나가 떡하니 보여 가서 목을 축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우물을 들샘이라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새소리도

청명하니 참으로 고즈넉한 동네였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끈이 툭툭 다 터져버린 짚신을 얼른 바꿔 신고는 동네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때마침 저 벌판 끝에 두 칸짜리 초가집이 있어 조심스레 주인장을 불렀습니다. “안에 누구 계시오? 내 여기 날이 어두워져서 그러니 내일 동틀 때까지 눈 좀 붙여도 되겠소?” 해도 아무런 기척도 안 들리는 게 꼭 흉가만치로 그런 느낌을 팍 주는 거 아니겠어요? 사내는 내 팔자 더 무서울 게 무엇 있겠느냐 하면서 들어가서는 다리를 뻗고 누웠습죠. 사내는 하루가 고단했던 터라 바로 스르르 잠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밖이 웅성거리는 수상한 기척을 느낀 사내는 눈을 슬며시 떴습니다…….

 

4

 

문을 턱하고 열고 나가니 동네 꼬마가 저 멀리서 뛰어오더니 사내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니 도깨비 집에서 주무시면 어쩝니까요? 지금 도깨비들이 다 깨어났습니다요! 지금 배자못에 벌-겋고 시-퍼런 도깨비불이 일렁일렁하더니 우리 동네 아씨를 잡아갔지 뭡니까요?!” 사내는 윗도리를 입는 둥 마는 둥, 신을 신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꼬마와 허겁지겁 못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니 정말로 우락부락하게 생긴 도깨비 놈들이 동네 아가씨를 업고는 방망이를 휘두르며 불길을 뛰어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벌써 부리나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도깨비 놈들은 그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 모양인지 노래를 부르며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 위에서 춤을 추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녀석은 놈들의 대장인지 팔 척되는 키에다가 퍼런 뿔을 달고 얼굴에는 커다란 눈알 하나만 턱 있고, 또 한 녀석은 몸집은 어디 새끼짐승마냥 쪼끄만게 고약한 표정을 짓고 있지않나, 또 다른 한 놈은 머리에는 바가지를 뒤집어쓰고는 거적 떼기를 입고 멍청-허니 바보 같고 마지막 놈은 보라색 뿔을 세 개나 머리에 달고는 입술이 퉁퉁 부어있는게 영락없이 광대 같았지요.

5

사내는 어쩌면 이 도깨비떼들을 확 잡아버리고 아씨를 구해올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물에 빠진 동자승을 구해주고는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언뜻 지나갔습니다. “도깨비들은 불에서 태어나 불덩이와 생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그 힘들은 모두 머리에 달린 뿔에서 나옵니다. 뿔을 가려버리면 꼼짝도 못하는 것이지요. 나무아미타불” 그리고 사내는 눈을 부릅뜨더니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그래. 팔도구경도 하고 좋은 선인들도 족히 만났으니 이제 더 바라는 것 없다. 좋은 일하다 떠나는데 무슨 미련 남으리.” 그러더니 동네 꼬마들을 전부 불러 몰래 이렇게 말했지요. “저기 들샘에 가서 물을 세 물동이 가득 길어오거라. 그리고 이 복현에는 맡기만 해도 탁주를 마신 것 마냥 얼큰해지는 장미꽃들이 많다고 들었다. 장미꽃잎도 두 주먹

가져오니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꼬마들뿐만 아니라 복현 사람들 모두가 힘을 모아 가득찬 물동이 세 통과 장미꽃잎 한 바구니를 가져왔습니다. 사내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천둥소리와 같은 기합과 함께 도깨비들을 향해 뛰어나갔습니다. 도깨비들은 갑작스런 일에 뿔이 휘둥그레 커지며 소리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인간 세상에 저런 작자가 있었더냐?” 이 틈새에 사내는 속전속결로 도깨비의 뿔에 장미 잎들을 흩뿌렸습니다. 그러자 도깨비들은 눈이 시릭하고 풀리더니 실실 웃으며 방망이를 떨어뜨리지 뭡니까? 사내는 그 사이에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도깨비 놈들 안으로 들어가 아씨를 안고 나오면서 도깨비들 발밑의 불길에 물을 -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도깨비들 몸집이 서서히- 서서히- 작아지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더니 도깨비들은 사내에게 싹싹

빌고 울면서 소리치더랍니다. “아이고. 형님. 제가 감히 이런 분을 몰라 뵙고 말입니다요. 그러지 말고 저희를 살려주시면 착하게 살겠습니다요…….” 그 말을 들은 사내는 되물었지요. “내 정녕 그 말을 믿어도 되겠느냐?” “그렇습죠. 그렇습죠. 당연합니다요.” 그렇게 배자못의 물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질 때쯤 마을의 아씨가 사내한테 오더니 혼인을 청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내는 훠이훠이 손사래 치면서 말했습니다. “아씨, 저는 혼인을 할 팔자가 못 됩니다. 게다가 돈이라고는 모이지 않는 팔자입니다.” 하면서 극구 혼인을 못 한다고 미루었습니다. 그러자 그 뒤에서 대장 도깨비가 퍼런  뿔을 슥슥 긁으면서 말했습니다. “형님. 혹시 그 관상쟁이 말 때문이라면 저희가 다 해결해드리습죠. 얘들아 방망이 두들겨라!” 하면서 외치니 방망이질 한 번에는 기와집과 금은보화가 덜커덕 생기고 방망이질 두 번에는 사내와 아씨가 혼례복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둘은 동네에 잔치를 열고 도깨비에게 받은 보화를 복현 사람들과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둘은 아들 셋, 딸 하나를 낳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흐뭇해지는 이야기 한 편이지요?

 

 

ㅣ 편찬자 김민국이 남기는 말 ㅣ

 

 

이야기 속 사내와 아씨는 여전히 두 손을 꼭 잡고 복현을 이루는 촘촘한 집들 사이 사이를 거닙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배자못 위로 우뚝 솟은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떠나는 도깨비들은 터덜터덜 아쉬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집은 허물어지고, 마을은 없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의 기억은 녹슬지 않고 자리를 지킵니다. 한 사람의 시작과 끝이 바로 한 마을에 있습니다. 한 곳을 묵묵히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아름아름 내놓은 이야기들, 언어들은 그 자체로 빛납니다. 저는 어르신들이 복현에서 살아온 한 평생이 사내와 아씨 그리고 귀엽고 아둔한 도깨비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우리 기획자들은 단순히 그 언어들을 조금씩 다듬었을 뿐입니다. 이제 복현이라는 공간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겼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는 과거를 회상하고, 누군가는 과거를 상상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복현이라는 공간을 빼놓는다면 공허하게만 느껴질 그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특히 살아온 굴곡을 전해주기 위해서 선뜻 집에도 초대해주신 서성남 어르신께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작업을 다 끝내고 돌아보니 단순한 이야기를 썼다기 보다는 두고두고 꺼내볼 졸업앨범을 만든 것 같아 뿌듯합니다. 기록과 보존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