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현유사 2019

제비 이야기 – 김현진

어린 제비의 정겨운 눈으로 바라본 복현1동

복현유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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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비에요. 까만 턱시도 같은 꼬리 깃과 붉은 리본이 멋있는 바로 그 새랍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나를 잘 보기 힘들겠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봄마다 찾아오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나는 따뜻한 바람을 따라 엄마, 아빠, 언니, 동생,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한답니다. 그리고 꽃이 피고 새 나뭇잎이 나는 계절이 되면 내가 태어났던 마을로 돌아와 집을 짓지요.

내가 태어난 곳은 ‘복현’이라는 마을이에요. 나의 엄마도 여기서 태어났고 나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도 여기서 자랐대요.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대를 이어 복현마을에서 살아온 것이랍니다. 흙벽돌로 지은 작은 집 지붕 처마 밑 목 좋은 곳에 열심히 풀과 흙을 물어다가 흙집을 지으면 아늑하니 얼마나 좋게요. 처음 날갯짓을 배울 때 엄마를 따라 복현마을 곳곳을 놀러 다니며 이야기 듣는 것도 참 재미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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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과 가까운 곳엔 복현마을 사람들이 모여 필요한 걸 주고받는 곳이 있어요.그곳에 가면 제철과일과 채소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런 곳을 시장이라고 부른대요. 큰 시장에 비하면 작고 조용한 골목처럼 보이지만 엄마가 어릴 때는 골목시장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활기찼대요. 시장이 처음 생겼을 때는 자동차가 잘 다니지 않다보니 사람들이 쉽게 걸어 다니고 물건도 많이 사갔답니다.

엄마가 막 나는 법을 배워 할머니를 따라 동네 곳곳을 놀러 다닐 때는 높고 네모난 건물이 많이 없었대요. 그리고 복현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는 다른 마을에서까지 어린이들이 찾아 왔대요. 학교가 마치면 골목에서 어린이들이 여러 가지 놀이를 하느라 시끌벅적했답니다. 지금은 복현마을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이들이 줄어서 조금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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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깔이 아름다운 장미공원은 내가 종종 장미꽃을 보러 놀러가는 곳이에요. 장미공원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장미가 많이 피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고 공원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나의 할머니가 어릴 때 기억하기론 언덕배기에 야생넝쿨장미가 무성했대요. 아직 사람들이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인데, 빈터에 마을 사람들이 의자와 탁자를 놓고 쉬기도 하고 놀기도 했대요. 누군가 꾸미지 않아도 오랫동안 새잎이 나고 장미가 활짝 피는 모습을 매년 볼 수 있었다니, 상상만 해도 향긋한 봄이에요.

아참, 그때는 마을 전체에 집이 많이 없고 빈터가 많았대요. 골목골목 가득한 건물들만 봐온 나로서는 잘 상상이 잘 안 가지만, 붉고 넓은 바위가 곳곳에 많이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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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연못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어요.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엄마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요. 넓고 깊은 못이 있어 맑은 물을 마실 수 있었고 뾰족한 나무들이 숲처럼 자라 있었답니다. 복현마을이 아직 붉은 바위 언덕이고 집이 많이 없을 때라서 몇몇 제비들은 못 주변 나무 위에도 집을 지었대요.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배자못이라고 불렀답니다.

아니, 이런 도시 가운데에 큰 못이 있었다고? 처음 연못 이야기를 들었을 참 신기해서 나는 엄마랑 같이 연못이 있던 자리까지 날아가 보았어요. 다섯 갈래 큰 길이 나 있는 복현오거리 쪽인데, 지금은 아파트가 높이 서 있었어요. 아파트 사람들은 그 못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당연하게도, 그 아파트는 배자못을 흙으로 채우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지은 집이니까요.

배자못이 메워지기 전, 주변 큰길로 시멘트가 깔리고 자동차가 달리기 전에는 사람들이 소달구지를 끌고 다녔대요. 그 시절에는 마을에 가운데에 있는 화장실을 같이 쓰고 똥지게로 분뇨를 날랐답니다. 분뇨를 어떻게 처리했을지 궁금했는데 달구

지에 싣고 저 멀리 검단 마을까지 갔대요. 검단마을은 들판이 넓기도 하고 농사를 많이 지어서 분뇨를 버릴 수 있었어요. 복현마을에서 검단마을로 가는 길 주변에는 미나리광이 넓게 있었답니다.


멀리 다른 마을에서 어린이들이 학교 소풍을 오기도 했대요. 각자 싸온 도시락을 나무 밑에서 먹고 못 주변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았을 거예요. 어린이들은 배자못에서 들리는 몇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답니다. 밤만 되면 물귀신이 나온다더라, 불빛이 떠도는 걸 보았는데 도깨비일 것이다, 같은 무서운 이야기였어요. 진짜인지 확인해보자고 의기투합한 몇몇 꼬마들도 있었대요. 집이 멀어서 정말 밤에 찾아오는 아이들은 없었지만요. 증조할머니는 밤에 반딧불이 꽁무니에서 나는 불빛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못 주변을 떠다니는 걸 본 적이 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했어요. 그건 정말 귀신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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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이곳,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왼쪽,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와야 하는 지붕 낮은 집은 곧 사라져요. 오래돼서 마을 사람들이 살기에 불편한 점이 많아 새 집을 짓는다고 해요. 멀리 남쪽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에 복현마을로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아마 없어져있을 거예요. 마을사람들이 골목에 앉아 이야기하는 걸 듣고 나서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답니다. 나는 복현마을 안에서도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는 집,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주름살 같은 골목들이 특히 좋았거든요. 복현마을의 옛 모습이 어떤지,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높고 네모난 건물에는 지붕이 없어 제비들이 집을 지을 수 없으니까요.

나는 복현마을을 한 바퀴 빙 돌아 오래된 지붕의 색깔, 큰 도로와 작은 골목의 모양들을 보고 왔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이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가 나고 자라왔던 마을의 흔적을 잘 기억해두고 싶어요. 내 이야기는 또 다른 제비들에게 전해질 것이고, 우리는 봄이 되면 따스한 바람길을 따라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올 거랍니다.




ㅣ 편찬자 김현진이 남기는 말 ㅣ



어르신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며 옛 마을의 모습을 그림 그리듯 상상했습니다.

새가 되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고, 저는 복현1동 피란민촌에서 나고 자란 한 제비의 입을 잠시 빌렸습니다. 예로부터 사람과 가까우면서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제비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집의 모양, 골목의 길이,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세세한 이야기까지 담지는 못했지만, 어르신들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따라다녔던 시간이 모두 즐거웠습니다. 어르신이라는 말을 상당히 쑥쓰러워 하신, 하경진 선생님은 주민분들중에서도 동네 일을 다 맡아서 하신 청년에 속하셨습니다. 그림도 그려주시고,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글 쓰는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